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> > > <img src="http://15.165.222.35/fa83qm.jpg" alt="이미지" style="max-width:100%;"><br><br>■ 혁명의 첫걸음, 토지개혁 2편 > > ■ 혁명의 첫걸음, 토지개혁 2편 > > 이색을 비롯한 온건파 신진사대부가 있는 한 정도전과 조준이 꿈꾸어온 토지개혁이 불가능했으므로 정도전은 결단을 내렸다. 정몽주를 제외한 권근, 이숭인, 하륜 등 온건파 신진사대부에게 있는 죄, 없는 죄를 다 뒤집어 씌워서 그들을 탄핵했다. 심지어 자신의 스승인 이색까지도 탄핵하고 고문을 시키고 유배를 보냈다. 그러나 정도전은 정몽주만큼은 믿었기 때문에 살려두었는데,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만다. > > 온건파 신진사대부에게는 정몽주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.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정치 정적들에게 보복을 한 정도전에게 정몽주는 아주 크게 실망했고, 40년 지기 친구이자 절친 선, 후배 관계였던 두 사람은 완전히 적이 되었다. 정몽주는 정도전에 비하면 온건한 개혁파이던 조준을 설득했다. 정몽주의 설득에 넘어간 조준은 결국 정몽주의 주장대로 과전법(科田法)을 실시하는데 동의한다. > > 과전법은 공전(公田)과 사전(私田)을 막론하고 매 1결(結)당 10분의 1조(租)인 30두(斗)의 조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. 당시 보통 50%에 달했던 수조율을 대폭 경감하고 농민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한 것이다. 이 과전법은 조준이 처음 주장한 ‘계민수전법’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온적인 정책이었다. 그러나 고려의 백성들은 이 정도의 토지개혁도 감지덕지하여 환영하였다. > > 정도전은 과전법이라는 토지개혁이 양에 차지는 않았지만, 그 덕에 백성들의 지지 속에 조선 창업이라는 과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. 그러나 고작 조선개국 4년 만에 과전법의 도덕성은 흔들리고, 토지개혁 주창자인 조준과 혁명세력들이 오히려 부패에 앞장서고 있었다. > > 정도전은 창업의 기반이었던 혁명세력들과도 다투게 되었고, 창업의 또 다른 기반인 왕가의 왕자들과도 타협하지 않고 대립하였다. 그러면서도 정도전은 오히려 개혁의 속도를 더 높이려고 들었으므로, 그의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말았다. > > " > ♣ 제공 : KIMSEM의 역사로 놀자 > " > > 출처: http://hongdaearea.blogspot.com/2024/03/2_50.html > 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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