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> > > <img src="http://15.165.222.35/n5w0hb.jpg" alt="이미지" style="max-width:100%;"><br><br>■ 고려왕,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> > ■ 고려왕, 원의 사위가 되다 2편 > >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관제(官制)도 격하시키고, 왕실의 용어도 원에서 쓰는 용어보다 한 단계 격하된 용어로 바꾸었다. 선지(宣旨)는 왕지(王旨)로, 짐(朕)은 고(孤)로, 사(赦)는 유(宥)로, 폐하(陛下)는 전하(殿下)로, 태자(太子)는 세자(世子)로 하였다. > > 왕위에 오르기 위해 원에서 돌아온 충렬왕은 변발에 호복(胡服)차림을 하고 있었다. 충렬왕이 귀국하자 그를 본 많은 백성이 환호성을 질렀지만, 그가 하고 온 모습에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. 그러나 정작 본인인 충렬왕은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. 원에서 즐겼던 매사냥을 잊지 못해 즉위 초부터 응방(鷹坊)을 설치하여 사냥을 즐기는 등 향락에 탐닉하는 생활을 하였다. > > 비록 몽고의 침입이 끝난 뒤였지만, 원나라에 보낼 각종 공물(貢物) 때문에 전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다. 문제의 응방은 대표적 공물인 매 사육과 사냥을 전담하는 기구로서 개경뿐 아니라 각 도의 역(驛)과 외군(外軍)에도 설치되었다. 응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. > > 사냥을 좋아했던 충렬왕은 수시로 사냥을 나갔고, 마음이 내키면 멀리 충청도까지도 사냥 여행을 떠났다. 당시 사냥을 할 때에는 매 외에도 개를 동원하고, 화렵(火獵)이라 해서 밭이나 산에 불을 지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. 이 엄청난 사치에 놀란 제국공주가 왕의 잦은 사냥을 나무랄 정도였다. 충렬왕은 정력가이기도 했다. 사냥 뿐만 아니라 여색 또한 밝혀서 사냥을 핑계로 왕후 몰래 궁인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다. 그 중에서도 무비라는 궁인을 가장 총애하여 왕이 장단 도라산으로 사냥 나갈 때에는 반드시 무비를 데리고 가서 즐겼다. 그래서 사람들은 무비를 ‘도라산’이고도 불렀다. > > 어처구니없는 일로 백성의 원성을 자아내기는 제국대장공주도 마찬가지였다. 왕후는 하찮은 익명서의 무고를 믿고 김방경 등 중신들을 함부로 투옥하는가 하면, 충렬왕의 첫 부인인 나이 많은 정화궁주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오만한 짓도 저질렀다. 게다가 장사 수완도 좋아 일부 시종들의 말을 듣고 전국의 인삼이나 잣 등을 매점매석하고는 원나라 상인들에게 몰래 팔아 거액의 돈을 챙기기도 했다. 하지만 제국공주는 신혼 초를 빼고는 충렬왕의 바람기 때문에 무던히도 마음고생을 한 왕비였다. > > 그녀가 39세로 요절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하다. 제국공주가 죽자 원나라에서는 혹시 궁중에 있는 임금의 총비들이 저주하여 죽은 것이 아닌가 하여 철저하게 조사했다. 애매한 여자가 한둘 희생당했고, 그녀의 아들 충선왕은 귀국하자마자 애첩 무비를 비롯한 측근들을 살해했다. > > " > ♣ 제공 : KIMSEM의 역사로 놀자 > " > > 출처: http://hongdaearea.blogspot.com/2024/03/2_739.html > >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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