시설현황 글답변
본문 바로가기
메뉴열기
메뉴
닫기
센터소개
하위분류
인사말씀
미션&비젼
시설현황
조직구성
오시는길
입소안내
하위분류
장기요양
후원·자원봉사
하위분류
후원안내/신청
후원현황
커뮤니티
하위분류
공지사항
새소식
주간식단표
사이트 내 전체검색
검색
사용자메뉴
메뉴
닫기
1:1문의
FAQ
접속자
17
새글
시설현황 글답변
시설현황 글답변
이름
필수
비밀번호
필수
이메일
홈페이지
옵션
html
제목
필수
내용
필수
웹에디터 시작
> > > <img src="http://15.165.222.35/i5y0m2.jpg" alt="이미지" style="max-width:100%;"><br><br>■ 비밀프로젝트, 한글창제 3편 > > ■ 비밀프로젝트, 한글창제 3편 > >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그 이면을 살펴보면 조금 다른 이유가 숨어있다. 우선 세종은 조선 건국 초 4대(代) 왕으로서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조선을 빨리 안정화시키고 싶었다. 그때까지도 고려의 잔존세력이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다. 그러나 어려운 한문으로는 이 일이 불가능했다. 그래서 백성들도 배우기 쉬운 우리 글자를 연구하였는데 그것이 ‘훈민정음’이라는 것이다. > > " >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제일 먼저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것만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.진정 백성을 생각했다면 세종 때 백성들을 위해 쓰여진 농사직설이나 향약집성방을 먼저 한글로 편찬해야 옳았다. > ", > > 또 다른 이유는 세종이 원래는 한글창제가 목적이 아니라 중국 한자의 운율을 중국식으로 발음하기 위한 운율연구가 목적이었다고 한다. 이 일에는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가 앞장섰다. 그런데 세종이 운율연구 이상을 넘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 등 조정대신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. 그 상소문 제일 위에 최만리의 이름이 있어 최만리만이 한글에 반대한 어리석은 조정대신으로 지금까지도 오명(汚名)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. > > 그러나 최만리의 상소문 내용은 당시 거의 대부분의 조정대신이나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담당하고 있던 사대부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. > > 최만리는 세종이 가장 아끼던 집현전 학자였고 조선의 대표적 청백리였다. 세종이 그 상소문을 보고 화가 나 그를 잡아가두기는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풀어주고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와 주길 간청하나 최만리는 석방 즉시 낙향하여 돌아오지 않았다. > > 이처럼 쉽게 만들어져 누구나 환영했을 것 같은 훈민정음은 우여곡절을 겪었고, 반포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. > > 5살만 되어도 전부를 깨우칠 수 있는 쉽고, 과학적이고, 철학이 있는 문자 한글!!! 만약 세종이 조선사대부 지배층들의 그 거센 반대에 굴복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문자를 쓰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, 세종의 위대성에 감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. > > " > ♣ 제공 : KIMSEM의 역사로 놀자 > " > > 출처: http://hongdaearea.blogspot.com/2024/03/3_46.html > >
웹 에디터 끝
링크 #1
링크 #2
파일 #1
파일 #2
자동등록방지
자동등록방지
숫자음성듣기
새로고침
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순서대로 입력하세요.
취소
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장령산로 485
대표전화 :
043-733-1479
팩스 : 043-731-8535
Copyright © All rights reserved.
상단으로
PC 버전으로 보기